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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구례 10·19연구회, 광양 주령골·읍사무소 등 유적지 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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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인문학연구소 댓글 0건 조회 149회 작성일 24-02-20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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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순천대학교 여순지역학과·인문학술원(원장 강성호)이 공동주최하고, 광양·구례 10·19연구회가 공동주관한 '광양·구례 10·19사건 유적지 답사'가 15일 임송본 연구원의 해설로 진행됐다. 이날 답사는 국립순천대학교와 국립대육성사업단이 후원했다. 참가자들이 우산공원 광양 여순10·19추모비 앞에서 기념 촬영했다. 사진=이경희
광양의 문화공간으로 개조된 구 읍사무소 내부. 사진=이경희

국립순천대학교 여순지역학과·인문학술원(원장 강성호)이 공동주최하고, 광양·구례 10·19연구회가 공동주관한 ‘광양·구례 10·19사건 유적지 답사’가 15일 임송본 연구원의 해설로 진행됐다. 이날 답사는 국립순천대학교와 국립대육성사업단이 후원했다.

이날 행사에 참석한 강성호 교수(원장)는 인사말에서 “앞으로 관심 있는 많은 사람과 함께하기를 바란다”고 했다. 김용덕 전라남도 여순사건지원단장은 “앞으로 더 많은 지원이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해 큰 박수를 받았다.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19일 밤 여수 신월동에 주둔하던 국군 제14연대 일부 병사들이 제주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단독정부 수립 반대·미군 철수를 주장하며 여수·순천 등 전라남도 동부지역을 점령하면서 시작됐다.

다음 날 오전 여수와 순천으로 확대됐고, 순천에서는 경찰관들이 봉기군을 막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이때 광양에서 파견된 경찰도 여러 명의 사상자가 발생, 철수한 후 광양경찰서에 감금됐던 20여 명의 좌익 혐의자들을 주령골(반송쟁이)로 데려가 사살하면서 광양의 피해가 시작됐다.

당시 광양읍사무소는 1942년부터 2007년까지 65년간 행정의 중심을 담당한 곳으로, 1949년 습격 때는 관련 주민 수십 명이 우두머리(구산리)로 끌려가 사살되기도 했다. 1951년에는 빨치산 공격으로 청사와 부속서류고, 제반 공부 등이 화재로 소실되기도 했던 곳이다.

지금은 광양문화원으로 활용되면서 역사문화를 전시, 광양을 알리는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취재 당일 광양문화원 앞뜰에는 광양(光陽)의 빠른 봄을 알리는 홍 매화가 꽃잎을 활짝 열기 시작했다.

광양 문화원 앞 뜰에 핀 홍 매화. 사진=이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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